어제 마무리 하였다. 일주일은 본 것 같다. 이것이 아마도 3번째 본 것. 이번은 감회가 남다르다.
말로 전해질 수 없는 생각이라 하는데 내가 깨달은 자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달라지고자 하는 사람 스스로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 누가 떠먹여줄 순 없으리. 그래도 다가설 수 있도록 보다 좋은 도움을 주는 스승은 있을 수 있겠지. K라 불리는 본 책의 저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바로 그런 스승이다!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가? 케이의 다가가는 방법은 어떠한가?
집중으로 얻으려 하지 마라. 모든 행동을 바라보라. 놓치지 말고. 그리하면 그 작용과 끝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어떤 마음의 상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인류의 입장에서 생존을 하는 방향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선 우주는 여여히 존재하는 것이고 거기에 어떤 가치관을 투영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책은 공포로부터의 자유, 생각으로부터의 자유, 마음의 짐으로부터의 자유,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등등으로 이뤄져 있다.
공포는 그것이 과거로부터 연유한 것이고 미래를 향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육체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정신적인 것으로 왔으리라. 뱀에게 물린 후 피해야 한다고 배운다. 뱀을 보면 공포를 느낀다. 아니, 뱀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해도 공포를 느끼겠지. 공포와 욕망은 행동의 동인이다. 무언가 피하게 하고 하게 하는 것. 공포로 두려움으로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핵심인데, 즉 그것을 이용하여 대비를 하고 행동을 하면 되는 것이지 마음의 짐으로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내 식대로 고치자면 옳고 그름이 없는 여여한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몸으로 태어나서 가지게 되는 두려움. 옳고 그름, 해야할 또는 하지말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목숨과 상관이 없는 두려움이 넘쳐난다. 사회란 의미없음을 깨닫고, 마음은 이 안에서 배운 것들 때문에 매이지 말고 벗어나도록 해라. 애초에 우리는 매이는 것이 없다. 생존을 유지하려고 하는 이것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도 스스로 그러함이다. 어떤 누구의 의지도 없이 이곳으로 왔다. 그런 것이 역사이고 변화의 흐름이다. 흐름의 방향성은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래 지속되는 것이 오래 남으니까. 그러나 오래 남고 그렇지 못하고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우리는 항상 바로 여기에 여여하게 존재하는 것이니까.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은 사회가 아니 역사가 시간의 흐름이 변화가 안겨준 것이다. 나라고 하는 실체도 특별한 인과에 의해 이뤄진 것. 여여할 뿐이다. 그냥 그대로일뿐. 지금의 내 모습을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은 달리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어떤 과정을 거쳐 이렇게 형성되었는지 예상할 수 있으므로 굳이 지금 이렇게 된 상황에 또는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상황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기쁨 아니겠나? 그리고 끊임없이 어딘가에 관심을 두고 얽매임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이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이되, 설사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이고 어떤 것도 추구하고 노력하지 않음으로써(어떤 되어야 하는 것이 되려는 노력을 그만둔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지금 당장 뭔가를 하려고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껏 경험한 것 과는 다른 느낌의 편안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지금껏 모습이 이러한 깨달음과 역행하는 것이었으므로 변화가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랬던 것 처럼 사는 것이 쉽지. 그것이 회사생활이든 게임이든 하던 것을 하기는 쉽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은 어렵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며 살고 싶다. 새롭게 태어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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